'한국 과학사 대부"...송상용 교수 갑작스럽게 사망, 안타까운 사망원인(+나이)
‘한국 과학사학계 대부’ 송상용 전 한림대 사학과 명예교수의 갑작스러운 사망 소식에 사망이유와 원인에 관심이 집중되고 있습니다.
1970년부터 과학사를 강의하며 과학사·과학철학·생명윤리 연구를 이끌어온 송상용(宋相庸) 전 한림대 사학과 명예교수가 6일 오후 1시50분께 세상을 떠났다고 유족이 전했습니다. 향년 만 86세. 사망원인은 노환으로 알려지고 있습니다.
과학사 개척한 송상용 한림대 사학과 명예교수
1937년 9월 서울에서 태어난 고인은 1955년 서울대 화학과에 들어간 뒤 과학사에 관심을 두고 화학과 졸업 후 철학과에 학사 편입, 1962년 철학 학사 학위를 받았습니다. 1960년 서울대 의사학교실을 중심으로 한국과학사학회가 창립되자 창립회원으로 참여했고, 1964년 미국과학사학회에 가입했습니다. 1965년부터 한국외대에서 철학을 가르치는 한편, 서울대 철학과 대학원에 진학해 1967년 석사 학위를 받았습니다.
1967∼1969년 미국 인디애나대에서 과학사를 공부했습니다. 당시 미국은 반전운동과 함께 반과학 운동 바람이 거세게 불던 때였습니다. 이때 토머스 쿤, 레이첼 카슨, 헤르베르트 마르쿠제 등을 읽으며 과학주의적 인식에서 벗어나 과학기술에 대한 비판적인 시각을 키웠습니다.
이후 1970년부터 서울대 등 여러 대학에서 '과학사'와 '자연과학개론', '과학영어', '문화사' 등을 강의했습니다. 고인의 노력은 1984년 서울대 '과학사 및 과학철학 협동과정' 개설로 결실을 맺었습니다. 1977년 성균관대 조교수로 임명됐다가 1980년 "정치교수로 찍혀" 해직됐습니다. 3년반 공백을 거쳐 1984년 한림대 사학과 교수가 됐고, 교무처장·도서관장·인문대학장을 지냈습니다.
1973년부터는 '현대과학신서'(전파과학사)를 발간했고, 고인이 1980년에 출간한 '과학사 중심 교양과학'은 1980년대 초반에 국내에 과학사 관련 서적이 거의 없을 때 지적 갈증을 풀어준 유일한 책으로 꼽혔습니다.
'과학사' 대중화 주도한 송상용 교수
1970∼1982년 한국과학사학회 간사를 도맡아 금속활자, 첨성대, 아인슈타인 탄생 100주년, 산소 발견 200주년, 양자역학 50주년 등을 주제로 토론회와 발표회를 개최하고 과학사를 대중에 알렸습니다. 1979년에 창간된 '한국과학사학회지' 초대 편집인을 맡아서 1990년까지 12년간 12권의 학회지를 만들었습니다.
홍성욱씨는 2002년 한국과학사학회지에 실린 '한국 과학사학계와 송상용 선생님'이라는 글에서 "(고인이) 런던(London)을 '란든'으로, 마르크스를 '마륵스', 엥겔스를 '엥엘스'로 바꾸는 등 우리가 보통 쓰는 영어 발음을 원어에 가깝게 고치곤 했다"고 기억했습니다.
북한 '비날론 박사' 리승기(1905∼1996)의 생애와 업적을 한국에 소개하고 남북한 과학교류를 강조한 것도 고인이었습니다. 기회가 있을 때마다 자연사박물관 건립 필요성을 역설했고, 2000년부터 한국자연사박물관연구협의회 부회장을 맡았습니다.
고인은 한국과학사학회 회장은 물론 과학철학회 회장, 철학연구회 회장, 한국과학철학회 회장을 맡으며 과학과 인문학의 융합을 이끌었습니다. 1998년 한국생명윤리학회를 만드는 데 크게 기여했습니다. 환경운동연합 시민환경대학장, 환경연수원장, 환경교육센터 이사장을 지내는 등 환경운동과 생명과학에 깊은 관심을 쏟았습니다. 1992년 사재 1천500만원을 기부해서 '한국과학사학회논문상'을 만들었고, 1977년 한국과학저술인협회를 창립, 초대 간사장과 회장을 지냈습니다.
전호근 경희대 교수는 "강의 중에 조지프 니덤과의 이야기나 에릭 홉스봄과의 추억을 들려주시는 게 그렇게 재미있을 수가 없었다"며 "이야기보따리 같은 분이셨다"고 회상했습니다.
유족은 딸 송지연·송혜연씨가 있습니다. 빈소는 서울성모병원 장례식장 7호실, 발인 9일 오전 5시.